[조영섭의 스포츠 연예가 산책] 김태식을 KO로 잡은 사나이 고기봉
- 오피니언 / 조영섭 / 2022-11-01 21:32:16
[조영섭=스포츠 전문기자]계절은 어김없이 또 순환(循環)되어 겨울의 문턱에 서서히 접근하는 11월이다. 사계절이 되풀이되는 건 자연의 섭리이기에 그 흐름에 순응하며 자연스럽게 묻혀 사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 주 컬 럼을 연재한다.
며칠 전 오랜만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 KPBF 심판위원장을 역임한 고기봉 선배였다.
올드팬들에게 WBA 플라이급 챔피언 김태식을 KO 시킨 복서로 알려진 고기봉을 만나러 그의 자택인 전농동 SK APT로 발걸음을 옮겼다. 1952년 10월 15일 경기도 파주태생의 고기봉은 유년(幼年) 시절부터 임진강 변에서 여름에는 수영을 겨울에는 스케이팅을 하면서 성장한 소년이었다. 수영과 스케이팅으로 상하 전신 근육을 균형 있게 발달시킨 그는 성장하면서 파주와 문산 일대에서 스트리트 파이터로 명성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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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배우를 꿈꾸던 20대 시절의 고기봉. |
고기봉이 나고 자란 경기도 파주는 조선 시대 장원급제를 9차례 한 성리학자 이율곡 선생의 본가(本家)가 있는 고장이다. 이곳에 위치한 임진강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勃發)하자 선조 임금이 부랴부랴 몽진(蒙塵)할 때 칠 흙같이 어두운 임진강을 건널 수 없어 율곡 선생이 여생을 보내던 화석정(花石亭)을 태워 불을 밝히며 도강(渡江)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강이다.
1969년 3월 고기봉은 복싱 사관학교 남산 공전에 입학하면서 원효로 동신 체육관에서 이한성 선생의 지도로 본격적으로 복싱을 수학한다. 당시 동신 체육관에는 홍수환·염동균·김학영 등 역대급 복서들이 포진되어 훈련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고기봉은 2년 선배인 홍수환·염동균과 많은 스파링을 소화하며 급성장을 이룬다. 고기봉은 홍수환에 비해 염동균이 스파링할 때 위협적인 복서라 평했다. 왜냐면 선수등급에 맞춰 페이스를 조절해주는 홍수환에 비해 염동균은 상대에 관계 없이 칼바람을 일으키는 양훅을 인정사정없이 휘둘러 체급도 낮은 고기봉은 식겁(食怯)했다고 실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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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공전 재학시절 고기봉(좌측) |
고기봉은 남산 공전 졸업반인 1971년 전국 신인대회에 출전 6연승(4KO)을 거두며 LF 급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167Cm 장신에서 죽창처럼 내리꽂는 날카로운 스트레이트에 총 맞은 노루처럼 하나둘 쓰러졌다.
1973년 3월 고기봉은 대통령배 서울 선발전에서 3연속 RSC승을 거두고 결승에서 천호상전 문명안과 대결을 벌인다. 일진일퇴의 타격전을 펼쳐 근소한 차이로 판정에 고개를 숙인다.
문명안은 당시 청소년대표와 전국체전 금메달을 획득한 최우수복서였다. 고기봉은 그 대회를 끝으로 복싱을 접고 군 복무를 시작한다. 36개월간 강원도 철원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군부대 스케이팅대회 3연패를 달성 10박 11일 포상 휴가를 3년 연속 다녀올 정도로 빙상부문에서도 녹슬지 않은 발군(拔群)의 실력을 자랑했다.
1976년 3월 군 재대 후 고기봉은 스케이팅 강사·수영강사 자격증을 동시 취득해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세심하게 수강생들을 지도하면서 <스타 강사>로 이름을 얻은 고기봉은 당시 월수입 500만 원을 상회하는 수익을 창출하면서 입지를 구축한다.
그러나 링에 오르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빵으로만 살 수 없었던 것. 결국 고기봉은 당시 원진 체육관에서 같은 파주 출신의 김정철을 파트너 삼아 실전을 방불케 하는 스파링을 치뤄 <녹다운> 시키며 건재를 과시했다.
2년 전 하늘의 별 이 된 김정철은 수년 전 동향의 복서 출신 역술인 박윤수와 함께 필자의 체육관을 내방 담화를 나눴다. 고향 선배 고기봉의 펀치력에 대해 묻는 필자의 질문에 한마디로 차돌처럼 단단한 펀치력을 보유한 선배 복서라고 회고했다.
김정철은 복싱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 동메달 (유고) 리스트로 현역 시절 원조 돌주먹으로 명성을 날린 복서였다. 1976년 12월 25일 고기봉은 프로 데뷔 전을 펼쳐 무승부를 기록한다.
고기봉은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망중한을 이용해 훈련하면서 1977년 3월과 7월 연속해서 링에 올라 무승부를 기록 3전 3무가 됐다. 1977년 9월 30일 또다시 경기가 잡혔다. 이번 상대는 1976년 12월 킹스컵 대표선발전에서 마수년(독립문)과 격돌 판정패를 당한 김태식 (필승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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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식을 KO시킨 고기봉 |
이날은 김태식의 프로 데뷔 전이었다. 당시 김태식은 약관 20살의 혈기왕성(血氣旺盛)한 나이였고 3년의 군 복무로 인해 긴 공백기를 경험한 고기봉은 에이징 커브(Aging curve)를 그리기 시작한 25살의 나이였다. 이 대결에서 고기봉의 라이트 일격에 김태식은 3회 1분 55초 만에 KO패 당했다.
예방주사를 맞고 출전한 1977년 11월 개최된 제7회 MBC 신인왕전에서 김태식은 4연승(2KO)을 거두며 대회 최우수복서로 선정된다. 이를 발판으로 김태식은 1980년 2월 WBA 플라이급 세계 정상에 올랐다.
고기봉은 1978년 5월 21일 신갑철을 상대로 4회 라이트 일격으로 KO 승을 거두며 3연속 KO승을 기록한다. 공교롭게도 신갑철은 1977년 11월 6일 김태식과 신인왕전 1차전에서 맞대결 접전 끝에 판정패한 복서였다.
신갑철은 1977년 4월 문화체육관에서 개최된 제8회 아시아선수권(자카르타) 국가대표 선발전 최종결승에서 KO율 80%를 상회하는 김정철과 최종결승전에서 맞대결 <무쇠 턱>을 자랑하면서 판정패를 당한 전력이 있는 복서였다. 필자도 새천년 서울체고 강사로 재직시절 신갑철의 아들 신동천(한국체대 졸)을 지도한 경험이 있다. 온몸에 철갑을 두른 듯 맷집이 견고한 복서였다.
1977년 7월 3승 (3KO) 3무를 기록한 고기봉은 김영환(필승)을 상대로 10회전 경기를 펼친다. 당시 경기장에는 자신에게 스케이팅을 배우는 리라초등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이 운집해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고기봉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김영환에 2회 KO패 당하면서 복싱을 접는다. 그는 패배에 대해 단 한마디 변명도 내뱉지 않았다. 사나이다운 진면목(眞面目)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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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케이팅과 수영으로 단련된 고기봉. |
복싱계를 떠난 고기봉은 강사로 명성을 이어나갔다. 여름에는 수영강사로 롯데월드와 압구정동 실내수영장을 중심으로 수강생들을 지도, 겨울에는 용평 진부령 천마산 스키장에서 학원생들에게 스케이팅을 가르치며 본업에 충실한 고기봉은 1980년 결혼과 함께 용인에 45평 APT를 매입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런 전력을 지닌 고기봉을 필자는 지난 2010년 어느 날 그가 KPBF 심판위원장을 맡을 때 우연히 경기장에서 마주치면서 연을 맺었다. 첫 만남에서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갔어도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준 필자에게 그는 다가와 꽃이 되어주었다. 그를 통해 그의 친동생인 고연봉 KPBF 심판위원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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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고기봉·고연봉 KPBF 형제 심판위원. |
고연봉도 1981년 전국 신인대회 LF급 결승에서 진승호를 2회 KO 시키면서 5연승(3KO)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한 난형난제(難兄難弟)를 형성한 복서 출신이다. 1963년 경기도 파주 출신으로 필자와 친구(親舊) 사이인 고연봉이 출전한 이 대회를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코크 급 경기에서 전남체고 1학년 오광수가 한양공고 2학년 김광선을 판정으로 잡고 우승을 차지한 대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대회에선 킹스컵 최우수복서인 진행범 (영산포상고)이 페더급에서, 1984년 LA 올림픽 동메달 전칠성(목포 덕인고)이 라이트급에서, 아시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88서울올림픽 국가대표로 출전한 송경섭(청주농고)이 웰터급에서 각각 우승을 차지한 대회였다.
고연봉은 파주에서 열차로 서울역에 도착, 다시 버스를 타고 왕십리 <원진체육관>에 도착해 훈련하면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그를 지도한 원진 체육관 김용석 사범은 당시 고연봉은 체육관 동료인 81년 우수신인왕 출신 손오공보다 파워 나 체력에서 월등한 유망주였지만 복싱을 일찍 접어 매우 안타까웠다고 필자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고연봉이 아마 전적 15전 13승 (11KO) 2패를 뒤로하고 2년간의 짧은 선수 생활을 끝으로 복싱을 접자 고기봉은 안타까움이 극에 달했다는 후문이다. 동생 고연봉도 현재 파주에서 입지를 구축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했다. 사실 고기봉·고연봉 경우처럼 형제 복서가 복싱으로 전국대회를 나란히 석권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박형춘·박형석 형제 복서. 박형옥·박형대·박형일 3형제 복서. 김광민·김광수·김광섭 3형제 복서 등 극소수 형제 복서가 손꼽을 정도로 진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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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고기봉 심판위원장·유제두 챔프·고연봉 심판. |
WBA Jr 미들급 챔피언 유제두 관장도 아마 시절 올림픽 선발전과 전국체전 결승에서 2차례 은메달을 획득, 1975년 전국신인 대회와 1977년 아시아선수권 선발전, 1978년 세계선수권 선발전에서 3관왕을 이룩한 동생 유제형을 뒷받침하지 못해 형제 복서 금메달 획득 부문에서 아쉽게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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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병 본부장(좌)·고기봉 보안팀장. |
현재 고기봉은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체력운동을 지속적으로 병행해 탄탄한 근육으로 무장, 건강미를 뽐내며 조력자 권오병 본부장과 함께 인천에서 보안팀장을 맡아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올곧고 대쪽 같은 성품을 지닌 쾌남아 <고기봉 보안팀장>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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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6
- 삼봉님 2022-11-02 12: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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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가 영화배우같은 특별함이 있는 분이십니다
화려한 스타플레이어 뒤에 유명한 비하인드스토리를 오늘또 접합니다
숨겨진 주먹들의 스토리는 늘 재밋습니다
감사합니다
- 신성수님 2022-11-02 13:42:57
- 어제 인가 시흥대로 쪽에서 유제두 선생님을 뵈었다. 유제두 선생님은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지는 못하시는 듯 하다.내 어릴적 유제두 선생님의 시합을 보고 복싱에 대한 열정이 생겻었다. 고기봉 선배와 동생 고연봉 의 사진을 보니 예전에 같이 운동했었던 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조영섭의 칼럼을 보고 있노라면 복싱에 대한 열정이 다시 일어 나는것 같다.늘 재밋게 보고있고 또 다음이 기대된다.
- 유심조님 2022-11-02 18: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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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넘치는 고기봉 챔프의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
개인적으로 한국프로 복서중 김태식챔프의 복싱스타일이 가장 강렬하게 뇌리에
색인되어집니다.
그러한 김태식 챔프를 ko로 제압한
고기봉 챔프를 다시 기억속에 저장합니다.
전국 방방곡곡, 그 지역의 역사와
인물을 구수하게 풀어내면서
복싱스토리와 접목시키는 필자는
문.무인의 양수겹장입니다.
일신우일신 기원합니다.
- 이조이님 2022-11-02 21:48:48
- 한국 복싱의 역사를 연대별로 아주 재미있게 탐독하고 있습니다!고기봉 선수같은 잊혀진 선수들도 다시 제조명 해볼 수 있는 기사를 접하게 되어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 권심판님 2022-11-03 16:31:26
- 고기봉 심판위원장님 스토리인데 역시와 음식점 부페처럼 다양합니다,잘읽었습니다, 산해진미 육,해,공 진수성찬 입니다,기자님의 지식과 기억력 취재능력에 놀라움에 존경을 표합니다
- 박근문님 2022-11-03 23: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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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로권투 심판장 고기봉씨의 복싱사를
재 조명할수 있는 기자를 알고 기사를
새롭게 접할수 있다는것이 다행 스럽고
컴퓨터적인 감각의 기자인 만서의 탁월한
능력에 축전한다,
- 박근문님 2022-11-03 23:3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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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로권투 심판장 고기봉씨의 복싱사를
재 조명할수 있는 기자를 알고 기사를
새롭게 접할수 있다는것이 다행 스럽고
컴퓨터적인 감각의 기자인 만서의 탁월한
능력에 축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