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고려인의 영광과 고난이 점철된 160년 역사
- 칼럼 / 서한석 / 2024-09-12 10:54:02
대한민국의 영광과 고난의 역사를 아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역사를 배우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동포들의 160년간 생활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고려인의 역사는 160년전인 1864년 연해주 포시예트에 정착했다는 러시아의 문헌기록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 160년 동안의 전체적인 상황과 모든 사실관계들이 보다 종합적으로 거론되어야 대한민국은 고려인과 함께하는 건실한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고려인 160년의 역사를 설명하려면 몇가지 기준을 세워야 한다.
첫째는 고려인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이해가 필요하다. 왜 그들은 자신들을 고려인으로 불려지길 원했을까? 일제 강점기 이전 1860년대 조선말기는 혼란스럽고 기근이 심했다. 그런 피폐를 면하고자 연해주로 이주를 한다. 그러니까 한반도가 현재처럼 반으로 갈라지기 전 그들에게는 한반도 전체가 고국이였다. 그런 그들의 의식속에는 아직도 여전히 국가는 한반도 전체이다. 그래서 남한과 북한의 국호를 따르는 국민으로 불려지길 유보했다. 언젠가 이루어지는 통일된 조국을 바라는 마음때문에 러시아 연해주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지도자들은 고려인이란 명칭을 선택했다. 그런 마음들이 내포되고 집약된 표현인 고려인이란 단어는 한민족의 전 역사를 헤아린 자주적 선택이었다.
둘째는 대한민국 동포로서 핏줄이외에 어떤 끈끈한 정서적 문화적 유대감이 있는가에 대한 관점이다. 고려인들은 대한민국 땅에 11만명이상 살고 있다. 그들은 거의 전부 가족들이 모여 함께 살고 있다. 아빠 엄마 조부모들이 아들 딸 손자 며느리 사위와 살고 있다. 조국이지만 머나먼 대한민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래서 무조건 직계가족이 들어와 살고 있다. 이른바 대가족단위의 공동체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추석과 설 명절뿐만 아니라 한식을 중요 명절로 지낸다. 그리고 음식과 언어는 살았던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지역에 적응했지만 풍습과 가무의 생활습관은 고유한 전통문화가 숨쉬고 있다. 필자가 경험한 우즈베키스탄의 어느 가정집 어머니 생일잔치는 한민족의 흥겨운 잔치집 풍경을 재현하고 있었다. 말과 음식은 160년간 본토와의 단절로 변화가 있었지만 반만년의 문화전통은 변할 수 없었다.
세째는 고려인 동포들의 유랑의 역사가 과연 대한민국 역사속으로 구성하는데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가늠할 잣대가 필요하다. 고려인들이 러시아 연해주에 산다는 기록은 1864년 러시아 포시에트 지신허지역의 13가구 조선인 가구가 최초이다. 그곳에서 일제 강점기 전후 연해주 각계각층의 여러 독립운동단체 결성과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만큼 안중근, 홍범도, 최재형 등 혁혁한 독립투쟁 영웅들이 계셨다. 그리고 항일 투쟁의 금자탑인 봉오동, 청산리 전투와 독립투쟁의 근거지로서 수많은 활동이 있었다. 그렇게 굳건한 한민족의 토대가 구축되고 강화되는 기반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면면한 흐름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등장한 러시아 스탈린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한민족이 융성하는 연해주는 뜨거운 감자였다. 그래서 러시아 영토 보전과 일본의 극동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기지화 때문인지 20만에 달하는 고려인 전체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이로 인해 연해주에서 다져온 독립투쟁 역량은 소멸하였고 고려인들은 한반도와 멀어지는 정신적, 물리적 피해를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한민족이 러시아의 결정으로 강제 분리되는 아픔을 당한 것은 마치 살점을 떼어내는 동족이별이었으며 원나라나 청나라에 백성이 끌려가는 생이별과도 다르지 않았다. 강제 이주의 여파는 독립운동의 쇠퇴와 함께 고려인 공동체의 발전과 쇠락을 낳았다. 1992년 구 소련의 해체는 고려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이후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정착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 계기는 88서울올림픽을 통해 대한민국의 존재를 마음에 둘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1세기 들어서 대한민국에 들어온 고려인은 3,4,5세대이고 현재 이분들의 삶은 녹녹하지 않다. 역사의 굴절에 따라 고통받는 국민이 존재하는데 그 해결책이 당장은 막연한 상황이며 이를 타개해야 할 과제가 산적하게 놓여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 파생된 문제들이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의 목전에 놓여져 있음이다.
넷째는 고려인을 위해 대한민국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평가 받을만한 정책이나 사례들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고려인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국내에 들어오면 생활 문제와 함께 낮설고 당황스런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운 고국에 왔지만 환영받는다는 기분을 느끼기 어렵다. 일단 그들은 우리말을 잘 모르거나 첨단 자본주의 사회인 대한민국 시스템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어울리기 어려우니 위축되기 쉽상이다. 재외동포기본법이 추구하는 정체성의 함양과 유대감 강화, 이해와 신뢰증진을 통해 고려인이 권익신장과 동포 사회의 발전을 위한 제도 운영이 적절한가는 늘 의문점 이었다.
동포라는 명칭이 붙으면 왕래와 정착, 영주권에 따른 권리및 의무를 포용적으로 정하는게 국격에 걸맞는 처우일 것이다. 그런데 진전되기는 했지만 F5(영주권비자)발급은 여전히 인색하고 H2(방문취업비자), F4(체류비자)라는 제한적 규정은 고려인들을 매우 불편하게 한다. 특히 3년기한인 H2 비자로 일용직 취업을 하게 되면 고용인이 취업신고를 하지 않는 한 불법취업으로 과태료를 부과 받는 곤란한 경우가 수천건에 달하는 실정이다. 이런 원인의 여러가지 중에 가장 큰 것은 법 효력의 속지주의를 따르는 것과 노동환경의 변화를 불안하게 여기는 것이다.
고려인들은 대부분 1945년 해방 전 국적자들의 직계 자손들이거나 가족들이다. 그들이 대한민국에서 자유롭게 살려면 속인주의와 노동환경 다변화라는 실정을 긍정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노동환경이 열악한 곳에는 고려인이 있고 대한민국 경제 생태계의 하층을 담당하는 노고를 인정해야 한다. 영세기업과 일용직에서 많이 노동할 수 밖에 없는 고려인들을 더 낳은 생활여건을 만들어주지 못할망정 체류와 노동조건을 까다롭게 적용하는 것은 그들을 못살게 괴롭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려인의 역사는 조선 말 구습의 청산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구 소련의 핍박과 필사적 생존이 점철된 서사시이며 랩소디이다. 그분들은 대한민국의 품이 지금보다 훨씬 더 열리길 학수고대하는 동포들이다. 인정머리없는 법은 어쩔 수 없지만 한참 뒤떨어진 낡은 법은 손질하는 것이 선진국의 면모일 것이다.
안산대 경영학과 겸임교수 서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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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한인 이주 160주년 기념 국내 대표 사무국 너머 추진위원장 서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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